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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공간주안 리뷰어 13기] 패터슨
작성자 임선영 등록일 2018.01.05 조회수 339

그 쌍둥이의 이름은 일상과 예술

 

<패터슨> - 짐 자무쉬

 

월요일 새벽부터 다음 월요일의 시작까지, 영화는 패터슨에서 태어나 패터슨에서 살아가며 패터슨의 버스를 운행하는 패터슨이라는 남성의 일주일을 좇는 궤를 그리고 있다. 그 구조는 영화의 호흡을 마치 실제 현대 인간의 삶처럼 정신없이 지나가는 월화수목금과 조금은 여유롭지만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주말처럼 나뉘어 쉬게 한다. 줄자로 재어 놓은 듯 적확히 삼십분이 흐르면 자극을 등장시켜 드라마를 그리는 기존 영화에 익숙한 우리는 고조되는 긴장과 인물을 당혹케 하고 관객을 놀라게 하는 사건들을 자신도 모르게-기다리지만 <패터슨>에서는 일곱 번의 뜨고 지는 하루마다 짧지만 진한 휴식의 순간을 가지게 된다. 패터슨이 하루를 마치고 잠에 들면 관객의 감각도 한숨을 잔다. <패터슨>은 일상의 구석구석을 관찰하는 한 인물의 응시, 그의 호흡과 그 숨처럼 쓰이는 시를 읊는 영화다. 영화는 그렇게 관객이 한 인물의 내면이 외부로 연결된 경계의 공간에서 그 숨에 마음을 적시고 조용히 물결을 느끼며 부유하게 한다.

 

직부감으로 잠든 남녀의 모습을 내리찍는 첫 장면은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의 뱀파이어들을 떠올리게 했으나,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영화의 다음 날숨을 기다렸다. 고요하게 햇빛이 내리쬐는 방안에서 속눈썹을 깜빡이는 남자는 손을 뻗어 아날로그 손목시계를 살핀다. 여섯 시 십 오 분이 채 안 된 아침. 남자는 옆에 누워 잠든 여인의 몸에 온갖 감정을 실어 입을 맞추고 그녀의 허무맹랑한 꿈 이야기를 듣는다. 지나치게 고요해 몸을 간지럽게 하고 약간 이상함이 느껴진다. 미국의 모든 아침은 삐삐 울리는 커다랗고 네모난 글자가 박힌 디지털시계를 손으로 탁 치며 시작해야만 하는 줄 알았던 편견을 적용할 수 없어서일 수도 있고, 단순히 알람 없이는 기상할 수가 없는 나의아침과 다른 형상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동그란 모양의 단색 시리얼을 손바닥보다 작은 그릇에 담아 우적우적 씹는 남자는 옆에 놓인 푸른색의 성냥갑을 집어 든다. 그는 마치 물건을 눈으로 만지듯 응시한다. 그리고 숨 쉬듯 자연스레 시를 읊는다. ‘We have plenty of matches in our house…….’ 똑똑. ‘안녕 패터슨. 준비됐어?’ 버스는 정해진 길을 따라 움직이지만 시선은 거리를 소요하고, 귀는 대화를 흘리는 승객들을 향한다. 눈과 귀가 차분하게 세상을 더듬는다. 사뭇 진지한 표정은 어린 승객의 대화에 살짝 해제되어 입가에 미소가 담기기도 한다. 아내의 사진이 담겨 있는 런치박스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먹으며 패터슨은 계속해서 시를 쓴다. 일을 끝낸 그는 해가 붉은 길을 따라 집에 도착하고, 우편물을 꺼내 기울어진 우편함을 바로 세운다. 집에 있던 아내는 오늘도 시를 썼는지 묻고, 패터슨은 조금.’이라고 대답한다. 저녁을 먹은 후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하며 언제나 들리는 바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신다. 놀랍게도, 이렇게 시작된 월요일의 하루가 별다를 바 없이 화요일에도, 수요일에도, 평일의 마지막 날까지 반복되며 칸트의 그것과도 같이 하나의 패턴을 만들어 낸다. 이 견고한 규칙이 만드는 기적은 역설적이게도 변화와 새로움이라는 발견이다. 여섯 시 십오 분에 눈을 떴던 그가 여섯 시 삼십 분에 일어난 순간, 그의 시상이 바뀌었다는 사실, 문을 두드리던 동료가 늘어놓는 불평의 내용, 그가 귀 기울이는 대화의 주체가 아이에서 어른으로 달라졌을 때, 도시락 박스의 아내 사진이 바뀌었다는 것. 이와 같은 일상의 아주 조그만 사실들을 알아챈다. 클로즈업된 부분들을 통해 이러한 시선의 방식을 습득한 관객은 풀숏의 인서트에서도 심상을 얻는다. 이렇게 영화는 관객의 시선 역시 시인의 눈이 되어서 세상을 관찰하게 만든다.

 

아날로그를 고집하는 그는 그만큼 외부의 자극을 날 것 그대로 느낀다. 그 흔한 스마트폰과 랩톱 하나 없이 무조건 종이에 글을 써내려가면서 그러한 고집 때문에 반복되는 질문과 곤란한 일을 마주하기도 하지만 족쇄가 될 것이 뻔한 신식 문물을 거부한다. 작은 세상에 갇힌 현대인들 사이에서 세상의 모든 요소 하나하나를 느끼기 위해 감각을 벼른다. 집에 오는 길, 파사삭 소리를 내며 나무 위로 올라간 동물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 나무를 관찰하는 그는, 모든 일상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다. 세상을 관찰하는 남자는 그 조각들을 우려하기도 한다. 그는 퇴근길 길목 뒤에 혼자 앉아 있는 소녀에게 옆에 있어도 괜찮은지 묻는다. 패터슨의 노트처럼 소녀의 것에도 글자가 빼곡하다. ‘너 시인이구나.’ ‘.’ 참으로 아름다운 문답이 아닐 수 없다. 예술을 만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 예술인이구나, 하고 묻는 존중을 바탕으로 한 정중한 질문과, , 저 예술인이에요, 라고 말할 수 있는 당당함이라니. 역설적이게도 이 대화는 영화의 끝에서 패터슨이 받는 불시의 질문과도 이어진다. ‘당신도 시인입니까?’라는 낯선 이의 물음에 패터슨은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는다. 아마 이 대답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의미가 없겠다. 시를 좋아하고, 동경하고, 욕망하는 이들이 자신을 시인으로 부르든, 시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거부하든 복잡하지만 소중한 마음은 그 질문의 결론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트를 복사해두거나 그것을 출간해 등단하는 것이 패터슨이 시를 쓰는 행위의 목적이 아닌 이유다. 그렇기에 그는 시를 잃고도 마음을 조용히 추스르고 또 다시 시를 쓴다.

 

그의 시가 파괴된 사태에 속상함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주체는 패터슨이 아니라 그의 아내 로라인데, 이 상황은 단지 그들이 매우 다른 성격의 인물이라서 생긴 장면이 아니라 아티스트, 그리고 그와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팬을 대입해보면 재미있는 비유가 된다. 작품이 자신을 만든 작가가 아닌 타인을 만나는 순간, 그리고 그 감상자가 그것으로 인해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움직이게 된 순간 더 이상 그 예술을 총애할-비판할- 수 있는 권리는 작가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이를테면 메리 픽포드가 자신의 소녀 페르소나를 혐오하여 이전 작품들의 판권을 사들이고 불태워버린 사태를 이후 영화인들이 안타까워하는 현상처럼 (패터슨의 시를 파괴한 주체가 본인 스스로는 아니지만.). 때문에 로라가 패터슨의 시를 더 듣고 싶어 하고, 그 원고를 복사해두기를 간청하는 행위는 단지 그를 사랑하는 아내의 역할을 넘어 팬으로서의 욕망이라고 볼 수도 있다. 노트가 파괴된 사건에 분노하는 이유에는 단지 남편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을 넘어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로서의 감정도 포함된다. 예술을 말하는 영화는 이러한 장면으로 작가와 작품, 감상자로 이어지는 이 복잡한 예술의 삼각관계를 그려내기도 한다.

 

실연을 한 남자가 감정에 휩싸여 셰익스피어 비극 속 주인공처럼 말을 한다. ‘와우, 당신 배우해도 되겠구만.’, ‘저 배우인데요.’ 이 당혹스러운 다이얼로그는 배우와 배우 아님의 경계에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데, 이렇게 일상이 예술로 불릴 때,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의심하게 되는 순간이 드디어 당도한다. 패터슨 출신 예술가들의 사진 및 온갖 소식이 붙어 있는 바텐더의 명예의 전당과 패터슨이 매일 지나는 동상이 서있는 기념 공원 등을 통해 알아챌 수 있듯이 세상은 일상을 기록하여 역사를 만드는 행위에는 익숙하지만, 일상을 표현하면 예술이 된다는 사실은 외면하고 만다. <패터슨>은 일상을 지나치게 홀대하며, 예술을 과도하게 찬미하는 세상의 오류를 관찰이라는 미덕으로 시를 그려내는 패터슨의 시선으로 수정하고자 하는, 관점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고집스레 온 감각을 사용하여 세상을 느끼고 시를 쓰는 버스 운전수를 통해 일상이라는 신비로움과 그 예술성을 발견하게 한다. 특별한 무늬를 그린 컵케이크를 만들고 캔버스 대신 집 위에 그림을 그리며 컨트리 가수를 꿈꾸는 주부와 빨래방에서 랩을 하는 청년이 단지 우리는 모두 예술가라는 어떤 특정 시대의 캠페인 문구와도 같은 사실만을 의미하는 장치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런 일상의 예술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들의 이분화와 우위를 선점하게 하는 행태를 경계하자고 넌지시 권유하게 된다.

 

쌍둥이 자식이 생긴 꿈을 꾸었다는 아내의 말을 시작으로 영화는 패터슨의 하루에 온갖 쌍둥이를 설치해 놓는다. 그가 출근길에 자주 인사를 건네는 듯 보이는 쌍둥이 노파, 핑크색 코르사주를 머리에 매단 쌍둥이 소녀, 바에서 종종 마주치던 이웃의 쌍둥이 형제까지. 이렇게 매우 닮아 있지만 결코 같은 존재는 아니면서, 그러나 연결되어 있음을 거부할 수도 없는 탄생부터 함께하는 쌍둥이들이 마치 일상과 예술의 관계처럼 느껴진다. 예술은 일상 속에서 태어나며, 일상 역시 예술을 호흡기 삼아 숨을 쉰다. 짐 자무시의 또 다른 작품인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에서도, 불멸의 흡혈귀가 그 오랜 시간을 살면서 다양한 아호로 노래를 만들고 글을 쓴다. 그 작품에서는 죽음과 삶이라는 맞닿아있는 순간에서 예술을 말했는데 이번에는 일상과 예술의 경계에서 그 아름다움을 읊는다. 누군가는 무용하기에 아름다운 것이 예술이라고 말하지만, 또 다른 타인의 말을 빌려 덧붙여 보자면 내가 존재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존재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된다. 무용하고 유용한 것의 구분보다 가치 있는 것은 일상의 존재를 발견하고 관찰하는 것, 즉 일상을 예술로 부르는 순간 그 모든 존재들은 무엇이 된다는 태도다.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마치 삶과 죽음처럼 일상과 예술은 그렇게 함께 있다. <패터슨>은 이렇게 한 인물의 응시와 호흡으로 일상이라는 예술, 예술로 불리는 일상을 나지막이 찬미한다.

 

영화에 관한 감상을 쓸 때 내가 감히, 라는 생각이 들게끔 만드는 작품들이 있다. 지나치게 좋은 작품을 만나면 그런 생각이 든다. <패터슨>이 내게 올 해 그러한 영화로 첫 번째 작품인데, 때문에 며칠간 글의 마무리를 고심하던 때 우연히 오늘자 신문의 신간 도서 안내 부록에서 이주의 문장을 발견하고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내가 느낀 <패터슨>의 본질을 글로 풀어낸 완벽한 문장이었다. 패터슨이 일상 모든 것을 진지하게 관찰하고 시상을 발견해내는 것처럼 하루 내내 글을 고민하던 내게 누군가 선물을 내리는 듯했다. 그 선물로, 이 영화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풀어 쓰던 고백을 마무리한다.

 

창조성은 성스러우며 동시에 성스럽지 않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예술은 아주 참담한 노동이며 동시에 멋진 특권이다. 이 모든 역설들이 동등하게 진실이 될 수 있도록 당신의 영혼 안에 충분한 공간을 비워두라. 그러고 나면 내가 약속하건데 그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 엘리자베스 길버트, <빅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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